감동!

사랑이 있어 꿈이 있는 가정

더최고신문 2007. 10. 17. 01:12

 

사랑이 있어 꿈이 있는 가정


                                                김 음 강


“따르릉 따르릉......”

어머니를 모시고 예약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가야하는 나는 좀처럼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 휠체어육상트랙 강원도대표선수로 참가하게 되어 훈련을 하고 있어 피로가 겹쳐 잠을 자고 있는데 “아! 오빠~ 추워, 추워.......”하는 아내의 울부짖는 소리에 새벽에 잠을 깨어 아내에게 이불을 더 덮어주고는 꼭 껴안아 주어야만 했던 나는 잠을 설치다가 겨우 잠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일정에 맞춰야 하기에 아내는 요란한 시계소리에도 잠을 깨지 못하자 “오빠! 오빠!”하며 나를 부를 뿐, 나를 흔들어 깨우지는 못한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는 뇌병변(뇌성마비)장애로 인해 지체장애 1급이고, 고관절 수술을 한 결과 병원 측에서 인공관절이 맞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뼈를 마구 잘라 인공관절을 넣을 수조차도 없게 하여서는, 인공관절도 없이 뼈가 마주치게 만들어서 평생 염증과 통증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기 때문에, 배에 베개를 바치고 다리는 끈으로 묶고 하는 복잡하고 답답한 절차를 거쳐야만 잠을 잘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루하루 잠자리도 불편하거니와 염증과 통증으로 인해 오한이 자주 오기에, 아내도 잠을 설치기는 마찬가지거니와 한쪽으로 꼼짝없이 시체처럼 누워 있는 아내로서는 나를 흔들어 깨우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잠을 설쳤다는 이유로 중요한 일에 시간이 늦거나 일처리를 못한 경우는 아직은 한 번도 없다.

누군가로부터 “아이는 몇 명이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아내는 나에게 미안해한다. 매일 통증 때문에 독한 약을 달고 사는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되면 통증에도 약을 먹을 수 없는 아내는 견딜 수가 없기에 아이를 낳지 않았기에 그러하다. 아내가 “미안해요.”라고 할 때면 나는 항상 “부부간에는 고마워, 감사해라는 말은 하여도 미안하다는 말은 불필요 해.”라고 한다. 그러면 나의 사랑스런 아내는 “알았어요. 고맙고 감사해요.”라고 즉시 말한다. 그러면 나는 “나도 자기가 있어 고맙고 감사해요. 한번만 더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혼난다.”하면 “알았어요.”라고 대답하고서는 나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아내는 번번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게 된다.

사실 아내에게 “부부간에는 미안하다는 말은 불필요하다.”고는 말했지만, 나로서도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왜 없겠는가!

처음 아내와 살면서 나는 바쁘고 피곤하여도 세끼의 식사를 준비했었지만 몇 달 뒤부터는 아내와 논의해 두 끼의 식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하는데다가 바깥일도 함께 하는 나로서는 식사시간을 일정하게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아내는 배가 고파도 참는 경우가 많다. 어쩌다 잠시 집을 비우다보면 아내는 출출하고 배가 고파도 참고 견디다가 때를 놓쳐 식사를 하다 보니 자주 체하기도 하고 “속이 쓰리다.”라고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아내는 밥 이외에는 주전부리를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간식이라도 먹지. 왜 배가 고파도 참고 있어?”라며 화를 낸다. 사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에서 화를 내는 것이다. 자기방어의 능력이 없어 바깥에서 문을 잠그고 가길 원해 문을 잠그고 가는 것도 가슴이 아픈데, 장애가 심해 챙겨 먹기도 많이 힘이 들어 굶기까지 하는 아내에게 내가 많이 부족하기에 나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바깥에서 문을 잠그고 혼자 외출을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신변처리를 스스로 할 수 없는 아내는 평균 3~4시간 마다 소변을 보지만, 날씨와 기온, 몸의 상태에 따라 1~2시간마다 소변을 보기도 하고 갑자기 설사나 대변이 마렵기도 하기에 장시간 집을 비울 수도 없기에 일을 보다가 집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여의치 않는 일이기에 어쩌다 가사도우미가 오는 날이 아니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승합차에 태워 함께 다닌다. 장시간 일을 보는 경우에는 아내를 자동차에서 내리게 하여 함께 다니지만, 일을 보는 시간이 짧은 경우에는 아내는 내가 일을 보는 동안에 자동차 안에서 혼자 있게 되는 것이다. 자동차에서 타고 내리는 것도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고 휠체어가 두 대 들어갈 수 있는 넓은 화장실도 많지 않아 외출 시, 대부분 자동차 안에서 신변처리가 이루어지다보니 아내는 많이 힘들고 불편한데도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면 마냥 행복해한다. 나에게 자기 혹은 오빠라고 호칭을 하는 아내는 “오빠!(자기야!) 나보다 행복한 여인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라고 하면서 아내는 활짝 웃는다. 내가 “왜?”하고 묻자 나의 사랑스런 아내는 “신랑하고 항상 같이 있지. 거기다가 자기가 하는 일 때문에 전국적으로 많이 다니니까 여행도 많이 하지....... 그러니까 나보다 행복한 여인네가 어디 있어?”한다. 특별한 돈벌이가 없어 기초생계수급자로 선정되어, 최소한의 생활비에 대부분 차량유지비로 길에다가 거의 돈을 뿌리는 현실이라, 외식은 꿈도 못 꾸고 맛있는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좋은 옷도 입지 못하면서도, 김치와 콩나물무침만 가지고 먹는 식사에도 “난 외식보다는 오빠가 해주는 반찬이 제일 맛있어.”하면서, 그래도 남편이라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아내가 무척 사랑스럽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내가 현재하고 있는 일은 전업주부이며 아내의 간병 역할, 무보수로 하는 장애인복지신문 속초지사장/기자로 활동하고 있고, 지체장애인협회 속초지회 운영위원, 휠체어육상 강원도대표, 한길복지공동체 이사/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어머니와 중증장애인의 병원 이동 등도 책임지고 있다. 돈을 버는 일이 아닌 오히려 돈을 쓰고 다니는 일만을 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나의 경제적 무능력에 대해 아내는 투정을 부리거나 바가지를 긁지도 않으며, 묵묵히 남편을 믿고 따른다. 이런 아내가 있어 나는 오늘도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자서전도 준비하고 육상에서 사이클로 종목을 바꿔 국가대표가 되어 내년 베이징 장애인올림픽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둬 장애인스포츠 발전에도 기여하고자 아직 사이클 장비는 구입하지 못하긴 해도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들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쏟고 있다.

 

[제27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 휠체어육상 트랙 200m에서 승리를 다지며......]

 

[제27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 휠체어육상 트랙 200m에서 동메달획득 후 아내에게 걸어 주고...]

 

우리부부가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계기는 이러하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전 나는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이뤄 속초 대포항의 [춤추는 커피]로 불리며 대포항의 명물로서 노점상 커피행상이긴 하여도 그 수익금으로 어르신, 재가 장애인, 소년소녀가장, 심장병어린이 등을 돕는 신명나는 삶을 살아가던 중 아내를 교통사고로 인해 먼저 떠나보낸 이후 세상을 비관하며 날마다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삶의 희망이라고는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인터넷사이트에서 도움을 호소하는 시설의 한 장애여성의 글을 발견하고 도움을 주고자 서로 연락을 취하게 되었다. 현재 나의 아내인 것이다. 시설에서 나와 자립을 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글이었다. 원칙적으로 시설이 없는 세상을 원하고 있던 나였기에, 그룹 홈이나 자립생활에 대한 도움을 주어야한다는 생각에 연락을 취하게 되었고, 시설의 행사취재를 부탁하는 시설직원의 부탁으로 취재를 겸해 그녀를 만나볼 요량으로 시설을 방문해 만남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시설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전 도움의 손길을 부탁하면서 “나는 장애가 심하지는 않아요. 남들은 장애가 심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했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어 놀라움을 갖게 되었다. 뇌성마비로 인한 장애로 스스로 신변처리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본인은 장애가 심하지 않다고 너무나 당당한 것이 아닌가! “내가 보기에는 장애가 심한 것 같은데 본인은 장애가 심하지 않다고 하는데.......”라고 하자 “나보다 심한 장애를 가진 사람도 많고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으니까요.”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생각의 차이가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를 가진 모습이 아름다웠다. 취재를 한다는 명분으로 시설에 방문한 것이라 그녀와 함께 많은 시간을 갖고 싶어도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어 그럴 수 없었고 그녀 또한 나의 주위를 맴돌면서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인양 행동을 조심하는 모습이 비춰졌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서는 취재를 마치고 행사 기념책자와 팸플릿 등을 받아 들고는 속초로 돌아왔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속초로 돌아오면서 그녀를 위해 내가 어떻게 도움을 줄 것인가에 많은 생각을 할애했다. 현재 여성장애인들이 함께 하고 있으면서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그룹 홈이 있는지, 혹은 그녀와 함께 그룹 홈을 만들 의향이 있는 여성장애인들을 모으는 일, 방을 하나 마련하고 단체, 자원봉사와 도우미 등을 활용해 독립할 수 있는 여건 등....... 집에 도착하여 그녀가 있는 시설의 행사책자를 살펴보다가 그녀가 쓴 시를 보게 되었고, 18년의 세월을 부모형제가 있는 집을 그리워하며 시설에서만 생활할 수밖에 없는 중증장애 여성이 시를 통해 희망을 노래하고 있음에 충격을 받았다. 순간 몇 시간 전에 보고 온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술독에 빠져 방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희망마저도 없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에서 공모한 시 부문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작품은 세 개의 바늘이란 제목의 시다. 이 시가 나의 방황의 늪에서 건져내고 희망으로 이끌어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게 한 것이다.


세 개의 바늘


                       정 지 숙 지음


조용한 공간에 있노라면

째깍째깍 세 개의 바늘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질서 있게 정확히 움직이는

세 개의 바늘

이 세상에서 순금보다 비싼 것은

시간이라고 합니다.


세 개의 바늘 위에 온 세계가 움직입니다.


흐르는 시간을 잡을 수 없듯

급해도 빨리 갈 수없는 것이 시간입니다.


지나간 시간을 추억으로 만들고,

지금의 시간을 행복으로 만들고,

미래의 시간을 희망으로 만드는


세 개의 바늘은 신비롭습니다.


 

[경기도에 있는 모 시설의 행사장에서 아내와의 첫 만남.......!]

 

보고 싶다고 달려가서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설에 있는 원생은 시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입장에서 오히려 곤란을 겪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마음을 빼앗겨버린 나로서는 오직 그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지체장애 1급으로 중증장애를 가진 내가 그녀의 신변처리 등 모든 수발을 할 수 있어야만 마음을 전할 수가 있었다. 나의 감정으로 상대의 삶을 책임지지도 못하고 고통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신변처리, 목욕, 잠자리, 식사, 외출 등 일상생활에서 내가 해결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전동리프트를 비롯해 보조 장치를 활용하고 머리를 써서 하나하나 필요한 문제를 해결해나갈 자신이 생기자 나는 용기를 내어 프러포즈를 했다. 전화나 문자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기에 나의 마음을 전달한 것도 전화와 문자를 통해서였다. 나의 청혼에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에 나는 실망하지 않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설 내에서 속마음을 털어 놓고 얘기하는 선생에게 그 기자가 “청혼을 한다.”면서 “미친놈.”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도 중증장애인이면서 모든 수발을 다 들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안지도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단 한번밖에는 만나지 않은데다, 도움을 주겠다고 하던 사람이 느닷없이 청혼을 하였으니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는 나였기에,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방안에 대한 나의 마음과 함께, “꿈과 희망마저도 잃고 삶의 의욕마저도 없던 나에게 희망이라는 용기를 갖게 함에 반했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달하자 나에 대한 그녀의 생각도 바뀌게 되었고, 결국 나의 진실 된 모습에 그녀는 어머니께 “시설에서 나와 독립하겠습니다. 좋은 사람이 있어 같이 살겠습니다. 허락해 주세요.”라고 하였고, 어머니께서는 “너 미쳤니. 그 사람을 얼마나 안다고....... 그리고 그 사람도 중증장애를 가졌는데 어떻게 너의 수발을 다 들어준다고 그래. 얼마 못가서 헤어지게 되어 있으니 아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고 그냥 시설에서 살아라.”고 하였으나 나에게 믿음이 갔다는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 난 그 사람이 왠지 믿음이가요.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난 그 사람에게 갈 거야. 그렇게 알아요.”라고 했고, 어머니께서는 단 한 번도 말을 거역하지 않던  딸이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기도 하고, 그런 딸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도 궁금하기도 하여 그녀의 남동생을 통해 나를 만나보도록 하였다. 지금의 처남과의 만남에서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권과 장애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전달하였고 그 상황이 어머니께 전달되어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다.”는 평가를 받게 되어 반신반의의 심정이나 딸의 의지가 너무나 강해 더 이상의 반대는 않고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주었다. 그녀 주위의 반대와 우려 특히 시설에서의 반대와 우려가 심했으나, 우리 두 사람은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동거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 그녀를 나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소개를 하였을 때, “착하고 똑똑해 보인다. 살림을 할 수 있는 여자를 만났으면 더 좋았을 터인데 본인이 좋다고 하니 반대는 안한다. 잘 살기 바란다.”며 새사람에 대해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밥하고 빨래하고 하는 일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을 중요시 한다면 마누라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부를 원하는 것이지요. 가정이란 일반적인 살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마음이겠지요. 공사판에서도 감독이 일반 노동자보다 인금이 높은 것처럼 집에서의 내조가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아직 결혼식도 하지 못하였지만, 우리 두 사람은 이렇게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함께 한 첫날부터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소변은 어려움이 없지만 대변은 무척이나 힘들게 처리하게 되었고 전동휠체어에서 침대로 올리고 내리는 일도, 자동차에 태워 병원으로 가는 일도 바닥에 앉아서 해결해야하는 나로서는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힘으로는 혼자서 들어 올리고 내릴 수는 있으나, 문제는 자세가 틀어지면 통증으로 인한 고통으로 견디질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런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랜 시간을 두고 해결해도 되는 문제가 아닌 당장 해결되어져야하는 당면 과제인 것이다. 사랑은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드는가보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고 보조 장치를 만들고 하여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자세가 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리를 묶어서 들어 올리고 내렸다. 그리고 쿠션이나 베게 앉은뱅이의자 등도 활용하고 전동휠체어에서 침대로 올리는 것은, 들어 안은 상태에서 몸을 구르는 방법으로 간단히 해결이 되었다. 목욕은 전동휠체어를 비닐로 감싸고 하여 휠체어에 앉힌 상태로 목욕탕에 들어가 해결할 수 있었다. 가지고 있던 승용차는 필요한 장애인에게 주고 봉고승합차로 바꿨다. 승용차에는 전동휠체어를 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동차에 태우고 내리는 일을 언제까지나 타인의 손을 빌려서 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해서는 문제해결이 되지 않기에 리프트가 필요했다. 생활이 넉넉지 않은 나는 605만원이나 하는 유압으로 된 리프트를 장착할 여유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환경도 아니거니와 마냥 손을 놓고 포기할 수는 더욱 없었다. 나는 리프트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목사님에게 자문을 얻고 12V 모터와 철판 도르래, 쇠줄 등의 재료를 구입해 철공소에 제작을 의뢰해 100만원의 비용으로 리프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아내를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면서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어쩌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볼일이 있으면 기저귀를 채워 놓거나 유료간병인을 두고 외출을 하는 안타까움이 해결이 되자 천하를 얻은 듯하였다. 기저귀를 채우게 되면 소변 독으로 인해 엉덩이 주변이 헐고 하여 여러 가지로 위생상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당사자의 기분이 좋지 않고 당시에는 가사도우미나 활동보조인이 없어 유료간병인을 쓰는 비용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아내가 나와 함께함으로써 어떻게 하면 편하게 돌볼 수 있을까를 고민도하고, 가정에 대한 의무가 생기게 된 결과, 전처와 사별 후 혼자 살아갈 때는 술독에 빠져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을 살아갔었는데, 가정에 대한 의무가 생기게 되어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꿈도 꾸게 된 것이다. 아내의 시가 잠자는 나를 불러 깨우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가정을 이루게 되어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키워나가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처음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가정을 이뤘을 때 아내는 라면을 좋아해 자주 라면을 끓여 달라고 했다. 나는 아내의 요구에도 한 달에 1~2번 정도만 라면을 끓여 주었다. 편하고자 하는 습관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기저귀를 채우지 않으려는 노력도 마찬가지다. 편하고자 하는 습관이 든다면 지금의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이 유지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오히려 서로에게 감사하며 더 큰사랑으로 키워가고 있다. 초심을 잃기 쉬운 것이 나쁜 습관과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이기적인 욕심만을 키우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부부는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서로에게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늘 “고마워요. 감사해요.”하며 의사표현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한길복지공동체의 이사이며 운영위원인 관계로 자주 그곳에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그곳의 중증장애인을 돌보다 보니 방을 필요로 하여 전기세, 인터넷 등의 절감을 위해 아내의 주소지를 그곳으로 옮겨놓아 행정적인 주소지는 달라도 우리부부는 늘 함께 있는 것이다. 휠체어육상 강원도 대표로 선수생활을 하는 관계로 전국장애인체육대회나 국제휠체어마라톤 등 각종 대회를 나갈 때도 아내와 함께 한다.

손이 부자유스러운데도 유일하게 본인의 의지대로 조금 움직이는 오른손으로, 비즈공예도 하고 컴퓨터를 통해 시를 쓰는 것은 물론이고, 세수와 화장도 하고 밥도 스스로 먹으려고 하는 등 무엇이든 스스로 하려는 아내를 바라보면 사랑스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한다.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불편하다고 가만히 있었다면 손이 굳어 아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비즈공예로 열쇠고리, 반지 등을 만드는 아내 옆에서 우리 딸이라고 하는 애견 단비가 손으로 아내를 긁다가는 “멍”하고는 고개를 휘젓는다. 간식을 달라는 것이다. “간식 줘? 알았어요. 엄마가 우리 단비에게 간식 줄게요.”

 

 

단비의 재롱에 사랑하는 아내는 마냥 귀엽다고 미소 짓는다. 그런 모습에 나도 미소 짓는다. 작은 것에도 미소와 감사가 넘치는 우리부부는, 오늘도 사랑이 있기에 꿈을 키워가고 있다.            


 

'감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의 길라잡이  (0) 2010.01.15
철인3종경기(아버지의 사랑)  (0) 2007.11.15
내가 만든 한글모자  (0) 2007.10.30
꼭 닮고 싶습니다  (0) 2006.12.23
편견을 넘어  (0) 2006.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