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신 마비 장애를 극복하고 철인3종경기 올림픽코스(수영1.5km, 사이클40km, 달리기10km)를 6번이나 완주한 김음강님을 만나기 위해 지난 21일 밤 강원도 속초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다리를 사용할 수 없어 생활의 모든 것을 두 팔과 휠체어에 의지하는 김음강님, 그가 전하는 뜨거운 도전과 행복넘치는 삶을 여러분께 소개한다.
‘먼길 오느라 힘드실텐데.. 제가 직접 마중나가겠습니다’
학교 수업 때문에 늦은시간 속초에 도착한 필자를 위해 직접 터미널로 차를 가지고 온 김음강님, 인터뷰 약속을 잡을 때부터 귀한손님이 온다고 말씀하시며 마중나오는 것을 자청했다. 행여나 불편하시진 않을까 많이 염려되었지만 걱정을 무색하게 할 만큼 밝게 웃으며 필자를 집으로 안내했다.
속초의 유명 호텔 뒤편 산골에 숨어있는 허름한 반지하 주택, 그곳에서 김음강님은 뇌병변장애를 앓고 있는 아내, 딸 같은 강아지 단비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두분이 함께 지내는 작은 방에서 인터뷰를 시작했고 간단한 자기 소개를 부탁했다.
안녕하세요. 김음강입니다. 저는 지체장애1급 장애인으로서 현재 핸드사이클 강원도 대표선수입니다. 가정에서는 전업주부이면서 사회에서는 장애인복지신문 지방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는 철인3종경기에 출전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하반신 마비 장애인들에게 철인3종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었어요’
필자는 김음강님을 2년전 철인3종경기대회에서 처음 만났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두시간 이상 늦게 골인 했지만 그가 보여주었던 끈기와 열정은 그 어떤 선수들보다 아름다웠다. 당시 행사장을 정리하던 스텝들과 개인물품을 챙기던 선수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김음강님의 완주를 축하했다. 필자에게도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뇌병변장애인 아들을 위해 철인3종경기를 하는 딕 호잇 부자의 사연을 접하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철인3종경기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외국에는 하반신마비 장애인들이 철인3종경기에 많이 도전하는 반면에 대한민국에는 한명도 없다는 걸 알았어요. 국내에서도 하반신마비 장애인들이 철인3종경기를 하도록 누군가가 길을 열어 주어야한다는 생각에 도전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불과 2~3주 정도의 훈련으로 휠체어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것이 마라톤 경험으로서전부이고, 수영은 어린시절의 개헤엄에 수영장에서 한 며칠간의 지구력훈련이 전부였어요. 사이클은 전혀 훈련을 하지 못하고 대회장소에서 장비를 빌려야 했죠. 겁도 없이 2008년 6월 15일에 열린 설악국제트라이애슬론대회 스프린트 코스(올림픽 코스의 절반거리)에 도전하여 얼떨결에 시간 내 완주를 하게 됐습니다. 이후 7월에는 수영강사에게 2시간 정도 자유형을 배워 올림픽코스에 도전했고, 5시간 20분 만에 힘겹게 완주했습니다. 그 이후 네번 더 올림픽코스에 도전했어요. 하반신마비 장애인들 중에는 저보다 더 뛰어난 전문 선수들이 많아요. 왕초보인 저의 모습을 보고 뛰어난 전문 선수들이 많이 참여하게 됨으로서 장애인철인3종경기가 활성화되길 희망하며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선수도 중요하지만, 길을 여는 길라잡이로서 왕초보도의 역할도 중요한 것이라 생각해요. 현재 눈에 띄진 않지만 많은 하반신마비 장애인들이 저를 따라 철인3종경기에 도전하고 싶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철인3종경기를 하려면 보조자의 도움이 필요해요. 하지만 시설지원이 된다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철인3종경기에서는 종목을 변환하기 위한 장소인 바꿈터가 있다. 선수들은 수영 후 이곳으로이동하여 옷을 갈아입고 바로 사이클 경기를 시작한다. 김음강님은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다른사람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장애인들의 경기는 일반인들과 어떻게 다를까?
처음 수영을 할 때 2명의 보조자가 저를 들어서 입수하게 도와줘요. 또한 수영을 마치면 일반 휠체어가 있는 곳까지 들어서 옮겨 주게 됩니다. 일반 휠체어로 바꿈터로 와서 핸드사이클을 타고 경기를 하고 사이클을 마치면 마라톤용 휠체어에 옮겨 타서 마라톤을 하여 경기를 마치게 됩니다. 주최측에서는 장애인 선수들이 바꿈터에서 핸드사이클과 마라톤용 휠체어를 타고 경기를 하기에 용이하게 공간을 확보하는 배려가 필요해요. 일반휠체어로 이동하여 입수가 가능한 시설에서 경기를 한다면 보조자의 아무런 도움도 필요치 않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철인3종경기 수영종목은 휠체어가 접근할 수 없는 부표위나 모래사장에서 출발한다)
‘5시간 20분만에 완주하고 아내에게 완주 메달을 걸어 주었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참고 이겨내서 결승점에 도착했을때의 그 성취감! 모든 철인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다. 김음강님도 그런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여섯 번의 모든 대회가 기억에 남지만, 2008년 7월에 있은 경주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올림픽코스 첫 도전에다가 가장 무더운 날에 치러진 이날의 대회에서 무려 5시간 20분만에 완주했죠. 다른 사람은 이미 짐을 챙기고 장내를 정리하고 있었지만, 결승점에서 나를 기다리는 아내와 재회하고 목에 완주 메달을 걸어 주었던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제 삶은 빈곤속의 풍요라고 할 수 있겠네요’
본인과 배우자 모두 1급 장애인이고 어머니 또한 몸이 불편하신 김음강님. 매달 마이너스 생활을 한다고 말하는 그였지만 그는 스스로를 ‘행복한 남자’라고 평가했다.
저의 아내는 뇌병변장애 1급이고 식사며 신변처리도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제가 간병인역할을 하면서 생활해야 하죠. 90만원 남짓하는 기초생계비의 3분의2 이상을 자동차의 유류비와 수리비, 보험 등에 쓰고 있어요. 중고차를 산지 7년이 되어 고장이 잦은데다 지금으로서는 자동차를 새로 구입할 수 있는 여건이 전무한 것이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어머니도 병원에 모시고 다녀야 하고요. 2년에 한 번 꼴로 아내가 큰 수술을 했고 앞으로도 목 디스크 수술과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해야 해서, 노점상이라도 하여 경제 활동을 하고 싶어요. 실제로 예전에 시장에서 커피장사를 해서 큰 돈을 번 적이 있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의료보호혜택을 받을 수 없어 병원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 이런 현실이 힘들다면 힘든 것이지만,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도 소속팀의 지원을 받으며 사이클 선수로 활동할 수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제 삶은 ‘빈곤속의 풍요’라고 할 수 있겠네요
‘택시를 잡으려는데 저를 태워주는 택시가 없었어요. 식당에서 거지취급을 받은적도 있었죠.’
부족한 삶을 살지만 행복하다고 말하는 김음강님, 밝게 웃고 있는 그에게도 분명 아프고 힘든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힘든 시절의 경험들을 조심스레 여쭤봤다.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제도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주셨다.
20대에 가구조각을 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닐 적에 많은 편견과 차별을 받았어요. 택시를 타려면 승차거부로 힘들었고 식당을 가면 동냥치로 오인 받기 일쑤인데다가 일자리를 구하려고 가면 무능한 사람이나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죠. 지방의 한 여관에서 저를 투숙시키지 않으려는 주인과 싸우다 신고를 받고 나온 경찰들에게 몰매를 맞은적도 있어요.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편견과 차별이 저를 더 강하게 만든 좋은 결과지만요. 장애인! 특히 중증장애인들에 대한 지원이 많이 되어야 합니다. 중증장애인들에게는 자립생활을 위한 활동보조서비스, 저상버스와 장애인콜택시와 같은 이동수단의 도입의 확대 되어야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없애고 동등한 인격체로서 대우해주는 의식이 꼭 필요해요.
‘아내는 내 삶의 가장 큰 활력소입니다’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밝고 유쾌한 삶을 살아가는 김음강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좋았다. 그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선물해주는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제 인생의 가장 큰 활력소는 가족이에요. 특히 뇌병변1급 장애를 가진 아내입니다. 제가 전처와 사별 후 방황할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 방황을 끝내게 되었고, 가정이 있기에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내가 있기에 식사를 준비하고 밥을 먹고 있어요. 아내가 없다면 ‘오늘은 누구와 술을 마실까’ 하고 날마다 술독에 빠져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을거에요. 그래서 항상 아내가 곁에 있어 감사하고 행복하며 꿈꾸며 살고있습니다.
‘나도 평등한 경쟁을 하고 싶어요’
김음강님의 도전을 접한 철인3종 동호인들은 기금을 형성해서 김음강님을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도움을 애써 거절했다.
국내에서 유명한 철인3종 선수가 동호인들을 모아서 경제적으로 나를 지원해줄려고 하더라구요.인터넷 게시판에 공고글을 올렸던데, 제가 그 글을 보자마자 바로 삭제해달라고 연락했어요. 나도 그 사람들이랑 다를것 없는 선수인데, 나만 혜택받는건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를 생각해주셔서 그러신건 너무나도 감사하지만, 저는 다른 선수들과 평등한 경쟁을 하는게 더 좋아요.
‘고향에서 품바차림으로 노점 커피를 판 적도 있어요’
세상의 온갖 풍파를 이겨내며 살아온 그는 경험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해왔던 일들은 매우 다양했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싶다는 그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전국을 떠돌며 13년간 가구조각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전국장애인운동청년연합에서 장애인 인권운동을 했어요. 동시에 고향 대포항에서 커피행상도 했죠. 품바차림으로 ‘춤추는 커피’로 불리며 대포항의 명물로 TV에 소개된 적도 있어요. 그 때 모은 돈으로 심장병어린이, 소년소녀가장돕기 캠페인을 하기도 했어요. 또 강릉교도소 정신교육강사, 속초경실련 집행위원, 장애인복지신문 지방부 기자 등으로 활동하였고 지금은 핸드사이클 강원도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겠죠’
그에게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어려운 환경앞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세상 누구보다 멋있었다. 세상을 향항 힘찬 페달링을 멈추지 않는 김음강님, 그의 꿈에 대해 들어봤다.
저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보다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대포항에서 ‘춤추는 커피’로 불릴 때 하반신마비 장애인이 각설이나 품바가 될 수 있다고 아무도 생각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겠지요.
스폰서가 생기거나 경제적 여건이 해결되면 철인3종경기 아이언맨코스(수영3.8km, 사이클180.2km, 달리기42.195km)를 완주하고 싶고, 자서전을 통해 저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나아가 저의 인생 스토리가 영화로 제작되기를 꿈꾸어 봅니다. 또한 작가 수업을 하여 작가로 활동하고 싶습니다
‘비록 갖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삼성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그는 실패와 좌절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을 것을 당부했다. 누구보다 큰 아픔속에서 의미있는 행복을 이끌어낸 그가 한 말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필자에게도 아주 강하게 각인되었다.
세상사가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없는 것 같애요. 그러기에 현재 꾸고 있는 꿈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핸드사이클 국가대표를 꿈꾸다가 젊은 선수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어 꿈을 접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랑하는 가족과의 시간도 많이 갖게 되었고 지금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기존의 것을 잃거나 버리게 되면 새로운 것의 시작이 되고, 자유롭고 다양한 삶을 살며 새로운 꿈을 이룰 수 있어요. 인간이 가진 에너지가 100%라고 할 때 그 에너지를 좌절과 방황으로 쓰기 보다는, 새로운 꿈과 현실의 문제해결에 쓰는 자가 성공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해요. 또한 최고로서의 쓰임도 좋지만, 최고가 아니더라도 내가 우리사회에 쓰임 받는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제가 ‘영삼성’에게 쓰임받는 존재가 되었네요. 이런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 주신 영삼성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시계를 보니 이미 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김음강님과 사모님은 시간이 늦었으니 집에서 자고 가라고 말씀하시며 이것저것 먹을것을 챙겨주셨다. 다음날 아침에는 첫차를 예매해놓은 나를 위해 다시 터미널까지 차를 태워 데려다 주셨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김음강님과 아내 정지숙님은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는듯 했다. 기사를 통해 다시한번 고개숙여 감사드린다.
(영삼성 회원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부탁했더니,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메시지’라는 세글자를 적어주셨다. 정말 유쾌한 인생을 사는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