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춤추는 커피

더최고신문 2011. 2. 23. 19:39

 

2010년 전국장애인체전 은퇴(?)경기 후 -에고 힘드네~ㅎㅎ

 

 

 

2010년 전국장애인체전을 끝으로 운동선수(사이클 강원도 대표) 생활을 사실상 마감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생각에 잠겨 거의 매일 밤 잠을 설쳤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는 날까지는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하고, 어떤 꿈을 꾸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은 결정 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삼륜오토바이로 속초 대포항에서 커피행상을 시작한 초기에 뽀빠이 이상용 선생님과 함께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심장병어린이를 돋는 활동을 시작하게 됨)

 

평범한 차림으로 장사를 하였을 때는 배달까지 하는 아주머니들의 틈에서 수입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작업복으로 품바 의상을 만들고 분장도 직접하고 나섰다.(1992년)

(이곳이 고향인지라 나는 초기에 이 차림 때문에 일부 어르신들에게 매일 "그 꼴이 뭐야? 임마."라며 핀잔을 들어야 하였지만, 끝까지 참고 이겨냈다.)

 

 

 

 

 

 

 

나의 새로운 도전은 [춤추는 커피] [품바] 등으로 불리우며, 대포항의 명물로서 방송이나 잡지, 신문 등을 통해 보도 되었고, 많은 사람들(미국 LA, 제주도 및 전국각지)이 찾아 주었고, 수입도 많아 소년소녀가장, 심장병어린이, 장애인, 독거노인 등을 도우며, 장애인복지신문 기자로, 강릉교도소정신교육강사, 속초경실련 집행위원 등의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나의 삶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나의 세상은 [신명나는 세상]이었고, 우리사회 모든 사람들이 신명나는 삶을 사는 세상을 꿈꾸며 앞만 보고 살아갔다.

그러나 신은 결코 나의 이러한 행복을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았다.

당시 25세인 나의 사랑하던 아내를 이승에서 영원히 떠나보내야만 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행상 좌판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간 아내는 집 근처에서 활어차가 후진하면서 차에 치여, 중환자실에서 15일간 투병하다가 결국은 나와 이승에서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이승에서 영원히 이별한 슬픔보다도, 병원에서의 [살인적 인권유린]이 있었고(항의와 시정을 요구 하였음에도 무시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체, 사랑하는 남편이 보는 가운데 가운도 커튼도 없이 수차례 면회객을 받음), 그로인해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지 않은 참담한 마음으로 이별을 고했다는 사실이 나를 무엇보다도 견딜 수가 없게 만들었고, 한국 최고의 재벌 산하의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을 상대로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고, 당시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유니텔 등의 4대 통신에서는 병원의 처사에 대한 항의가 빗발쳤으나, 일부 언론을 제외하곤 언론에서 마져도 광고주인 재벌의 눈치를 살피며, 외면(H신문 기자는 본인이 기사를 써도 데스크에서 짤린다. 기자로서 정말 죄송스럽다고 함. 시사방송 조차도 네티즌의 취재 보도 요망을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 하였다.

그리고 무었보다도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의 행위가 나를 못 견디게 하였다.

초등학교 동창들의 경우 아내의 사건과 관련해 서명을 받으러 간 나에게 그냥 "나는 안 할게." 하면 되는데, 비아냥 거리면서 "내가 봤어야지 하지..." 하는가 하면 억지로 마음을 추스리려고 애쓰면서 노점좌판을 벌이고 있는 곳에 와서 음식물에 팔뚝을 받치고나를 쳐다보면서 "교통사고 보상금(세금을 내는 뚜렷한 직업이 없는 1급 중증장애인의 교통사고 보상금은 호프만방식에 의한 보상제도를 법에서 악용하므로 노동력을 0으로 법에서 판단하므로 보상금도 0원이고, 위자료만 지급된다. 그 위자료도 사회적문제가 파생 되자 비장애인과 최근에 동일시 하고 있다는 것을 참고...) 많이 받았을 터인데 욕심도 많네. 장사하고 있게..." 하며 비아냥 거리는가 하면, 사고 보상금이 많이 나왔다고 생각하고는 술을 얻어 먹기 위해 "암이 걸려 사형선고가 내려졌다"면서 "술 한 잔 사달라"고 "술자리를 함께 하였더니 자기가 " 어느 조폭의 행동대장이다."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자랑만 늘어 놓는 것을 보고 이 놈이 암으로 사형선고 받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았고, 사랑하는 아내를 보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찌 인간이 이렇게 까지 추잡할 수 있나 하는 마음에 너무나 사람과 세상이 싫어졌고 삶의 의미를 잃어 버렸으나, [살인적 인권유린]을 해결하고 죽으리라 마음먹고 억지로 견디고 있었다.(자세한 내용은 자서전을 통해 추후 밝히고자 함)

 

아! 나의 길은 자살하거나, 미쳐서 정신병원에 가거나, 누군가를 죽이거나 상해를 입혀 교도소에 가거나 오직 3가지 길만 있었다.(몸에 항상 유서를 지니고 살았음)

결국 나는 술독에 빠져 미쳐갔다.

모든 꿈과 희망을 잃은체 말이다.

 

지금의 아내와 장애인생활시설에서의 첫 만남

 

그렇게 방황하며 미쳐가고 있을 때, 장애인보호시설에서 18년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시를 통해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왼쪽부터 나, 장모님, 각시, 나의 어머님

 

그리고 그녀가 좋아져서 프로포즈를 하였고, 결국 두 어머님께 허락을 받아 혼인신고만 하고 동거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나의 방황은 끝나고 장애인자립생활센터활동 등의 활동을 시작으로 지난 2007년부터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휠체어마라톤을 시작으로 핸드사이클 강원도 대표선수로 활동하면서 하반신마비 장애인으로는 국내 최초로 철인3종경기에 출전해 완주하는 등의 스포츠 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나를 방황의 늪에서 건져 주고 다시 꿈과 희망을 가져 준 지금의 사랑하는 아내 정지숙과 KBS강태원복지재단, 유어웨이를 비롯한 많은 단체 및 개인의 도움으로 지난 2011년 1월 12일 8년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또한 방황하면서 술독에 빠져 살아온 관계로 전체 틀니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천에 있는 서울삼성치과 등 치과 의사들의 도움으로 틀니를 하기 위해 진핸 중이다.

나는 내가 받은 사랑을 우리사회에 100배 1000배 이상 갚으려 한다.

 

현재 기초생계수급자로 최소한의 생계비로 살아가고 있어, 내가 가진 물질로는 큰사랑을 갚을 길이 없다.

15년 이전에 하던 춤추는 커피가 작은 재능이지만, 다시 시동을 걸고자 한다.

생계 수단으로서의 장사가 아닌 재능기부로서의 모금활동으로의 [춤추는 커피]를 준비하고 있다.

물질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가는 최소한의 물질이면 된다.

나에게는 재산을 물려 줄 자녀도 두지 않았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1993년에 장기기증운동본부에 나의 장기는 물론이고 시신까지 기증하였다.

무소유의 정신이 얼마나 가볍고 행복한가 하는 것은, 대포항에서 [춤추는 커피] 인생을 살면서 너무나 잘 안다.

재능기부로서 가장 돕고 싶은 대상이 최소한의 물질도 없어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의 기아들이다.

그들을 위해 일회성이나 일시적인 재능기부가 아닌 하늘의 부름이 있는 그 날까지 하겠다.

 

사람사는 신명나는 세상을 위해 나는 다시 신명을 낼 것이다.